http://yeohwi.egloos.com/1870661


오랜만에 Warfare Archaeology님 블로그를 갔다가 고조선-한 전쟁 관련해서의 이야기를 보았습니다. 군사학 개념을 많이 적용해보고 논쟁해볼 문제의 이야기이긴 한데  아무래도 단순하게 역사학적인 입장만 적용한 논문이 아닌가 싶긴 합니다. 사실 한국의 역사학계가 이런 군사학적 문제를 종종 무시하는 경우가 나오고 군사역사학계라는 개념은 사실 군 외에는 한국에서 그렇게 발달되지 못한게 사실입니다. 그러다보니 일전에 모 잘난 시간강사께서 남침유도론 개드립에 밀리터리 문제 즉 군사학 문제를 섯부르게 적용했다가 망신당해놓고 어처구니 없는 정신승리를 하는 꼬라지를 보여준 전례도 있지요.


아무튼..Warfare Archaeology님께서 요약해주신 논문의 핵심은 다음과 같습니다.


1. 북경부터 한반도 평양까지 육군이 오려면 너무 멀다.


    1-1. 당시 한나라군은 죄수부대로서 규율 및 훈련이 부족해 전투력이 낮았다.


    1-2. 5만이라는 병력 규모에서 공성, 치중부대를 빼면 실제 전투병력은 얼마 되지 않는다.


    1-3. 도하작전과 저항 기록은 딱 한번 뿐이었다. 즉, 도하하자마자 바로 도성이 있어야 한다.


2. 현대에도 어려운 상륙작전을 당시 감행했다고 보기 어렵다.


3. 기동 공간이 발해라고 분명히 명시되어 있다. 서해 연안을 빙 돌아가는 것은 너무 멀다.


4. 1년에 가까운 월동기간의 보급 과정 및 거리 문제가 있다. 


총 4가지인데.. 초보 밀리터리 매니아로서 어줍지 않는 군사지식 한번 적용해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오랜만에 역사포스팅을 보네요.


1. 


우선적으로 과연 북경-평양이 먼가의 문제가 있습니다. 당시 교통수단으로 볼때는 꽤 먼거리인건 사실입니다. 현재야 신의주에서 북경까지 기차로 6시간도 채 안나오는게 현실이기에 중국이 한국의 통일시에 한국군의 기동군단 전력을 위협으로 평가할수 밖에 없는 이유가 되는 종심거리가 되는 사항이기도 하죠.(한국군이 물론 신의주에 기동군단 자체를 전진배치하지는 않겠지만 평안도에 배치될수 밖에 없는 환경을 적용해본다면 그러합니다.) 하지만 고대 행군속도를 보면 로마군이 최대 1일당 20km를 넘는 행군을 한적도 있습니다. 그것도 35kg급 수준의 군장을 지고 말이죠. 춘추전국시대때에도 3일동안 행군했던 방연의 사례를 보아 원정군에 죄수부대가 있건 없건간에 오히려 원정군의 주력 선발은 정예로 할수 밖에 없다는 점을 감안할때 거리상 멀다라는 것만으로 이야기하기에는 무리가 있어보입니다.


더욱이 논문에서는 한군이 죄수부대라는 기준에만 함몰되어서 적용하고 있는데 미안한 이야기지만.. 무조건적인 등과법칙이 나올수 없다는 점은 이미 Warfare Archaeology님께서 지적을 해주셨고.. 동시에 죄수부대 자체가 소모성 부대로 적 전력을 최대한 소모시킨후 아군의 주력으로 적을 괴멸시키는 건 기본전술에 해당합니다. 죄수부대로만 설령 있다고해도 인센티브가 명확하다면 죄수부대가 정규군보다 과연 고대시대 병농일치 개념상 그게 확실한 열세라고 보기도 어렵고 숫적우위를 기반으로 했을때 이야기가 흔히 나오는 란체스터의 제2법칙 문제의 논리 자체를 그대로 적용해보면 고조선군이 1회 회전을 벌인후 전력적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후퇴했다면 1회 전투만으로도 결판을 지을수 있다는 문제가 나옵니다.


https://namu.wiki/w/%EB%9E%80%EC%B2%B4%EC%8A%A4%ED%84%B0%20%EB%B2%95%EC%B9%99


란체스터의 제2법칙의 성립에 관한 링크입니다. 나무위키에 잘 정리가 되어있더군요.  죄수부대로 고조선 주력을 소모하게 하면서 한군이 죄수부대의 질적 하락을 보완했다면 란체스터의 제2법칙은 충분히 성립한다는 논거가 나온다는겁니다. 고조선군이 최초 교전은 야전에서의 격돌이었다는 점을 감안해보더라도 충분히 란체스터의 제2법칙 성립은 가능합니다.


더욱이 만주지역의 고조선 유적 관련해서 제가 아는 지식이 없어서 함부로 이야기할수는 없으나 과연 고조선의 국가체제상 고구려만큼의 요동방어선 체계를 확립했는가 여부는 상당히 부정적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중앙집권체계를 마련하고 국력이 더 강했던 고구려조차도 요동방어선에 투자하고 성립하여 수나라 3백만 대군을 막아내고 심지어 고구려 멸망때까지 요동방어선이 무너지지 않게 했던 것은 1세기 이상의 고밀도 투자를 해서 였습니다. 



고구려성의 위치도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요서를 최초로 요동에 주 공격라인에 매우 촘촘한 방어체계를 성립해놨습니다. 이걸 하는데에만 고구려가 요동을 광개토태왕때 확고하게 점령한 이후로 100년넘는 투자를 해온 결과라는걸 잊어선 안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구려보다 인구와 경제능력 그리고 국가체계와 역량마저 상대적으로 많이 약했던 고조선이 요동에 방어선을 제대로 구축을 했을까요? 고조선이 요동이 방어전선이 명확하지 않아서 연나라와 진나라에게 어마어마하게 털렸던 사례를 감안해본다면야 그것을 재정비하는데 드는 역량투자가 과연 잘 정립이 되었는가의 여부는 논란대상일수 밖에 없다고 봅니다.


더욱이 고조선이 일심단결해 있었다면 모를까 우거왕때의 고조선-한의 전쟁을 보면 초기에는 왕을 중심으로 단결했지만 결국에 국가지도체계가 분열하는 양상을 보이게 됩니다. 대표적으로 상(相) 세력의 이탈등은 고조선의 권력체계를 흔드는 갈등으로 이어졌고 멸망원인중 하나가 됩니다. 정치체계가 확보한 중앙집권화보다는 느슨한 형태에 가까웠을 것으로 보이는 고조선의 정치체계의  추측 현실을 감안해볼때 유기적인 체계가 발휘되었을 것이라고 보기는 더 어렵습니다.


특히 2차 전쟁때에는 이탈이 두드러진다는건 유기적인 방어체계를 구축하기 힘들었을 것이고 이는 필요하다면 병력동원에 있어서도 원활하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백제멸망때나 발해 멸망때도 유사한 형태로 병력증원이 원활하지 못했고 그덕에 1차 방어선이 뚤리마자 파죽지세라는 표현이 적합할정도로 나당연합군이 기동을 했던 점을 감안한다면 1차 야전에서의 회전의 패배 이후로 왕검성(왕험성)까지의 기동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라고 봅니다. 


또 마지막으로 당시 황산벌 전투때 신라군도 5만명으로 백제영토를 깊숙히 기동을 했던 전례를 보면 전투부대의 규모가 적다고 보기도 어렵고 병력동원이 그렇게 수월하지 않았을 것으로 보이는 고조선군에 비하면 여전히 앞도적 물량에 가까웠을 가능성은 크다고 봅니다. 더 문제는 설령 고조선군과 1차이자 마지막 야전군 규모의 회전에 규모가 엇비슷했다하더라도 죄수부대 자체의 동원수준을 그렇게 기록을 안했을 가능성도 첨부해본다면야 5만명의 지상군 침공 규모에서 전투병력이 낮았다라고만 치부하기에는 무리가 있고 또 한의 수군의 존재 자체나 당시 고대 수군의 존재가 지상군을 조공하는 역할이었다는 점을 감안해봐도  보급라인에 그렇게 문제가 있을 것 같지는 더 안아 보여서 말이죠. 수군이 평양의 왕검성을 직공한것도 아니고 논문대로 설령 왕검성이 요동에 있었다고 하더라도 말이죠. 고조선 수준의 역할이 어떠했는지는 미지수이지만 한의 수군에 분전을 했어도 패배했을 가능성만 존재하거나 아니면 고조선 수군이 아예 규모가 미비하여 정규 해전을 수행할 역량이 안되었던지.. 아니면 고조선 수군을 우회하여 조공과 수륙협공을 했을 가능성은 농후하니까요.


즉 수군이 지원을 하고 있는이상 병참선에 무리한 병력운영이 안되었을 가능성이 상존하며 고조선 영토의 방어체계가 제대로 가동이 안되었다는 전제를 두어도 병참선 문제가 그리 심각하지 않았음으로 지상군 전투병력의 투자할애가 되지 않았겠는가라는 점으로 해석이 될수 있다고 봅니다.


2. 


상륙작전을 굳이 할 필요가 있었는가 여부도 있지만 수군의 목적이 지상군 조공이었다는 점과 보급 지원이었다는 걸로 해석을 해본다면 굳이 상륙작전씩이나 할 필요가 있었을까 하는 점은 여지를 볼수 있다고 봅니다. 즉 행정상륙을 통해서 지원을 하면서 꾸준히 직공하는 형태로 이미 지상군이 접수하여 최소한 안전한 지역에서 행정상륙하는 것을 생각해볼수 있기 때문에 고대에 상륙작전이 더 어려웠던 점을 감안한다면 간단한 지상군의 조공이라는 역할 수행에 있어서의 행정상륙만 노릴 가능성을 제기할수 있다고 봅니다.


즉 상륙작전을 안해도 꾸준히 지상군 엄호하에서 움직였다면 상륙작전을 할 필요가 없죠..





유사한 이미지로는 영화 적벽대전에서 이런 모습으로 확인할수 있고 말이죠.


3. 


기동 공간이 발해라고 명시되어있었다고 왕검성의 존재가 위만조선때 요동지역에 있었을 것이라고 보는건 설득력이 떨어진다고 봅니다. 즉 기동공간이라는거 자체가 결국 요동에서 제대로 야전군 규모의 회전이 있었다는 것으로 해석해봐도 아무런 문제가 안되니까요. 


4. 


2차 전쟁때를 보면 한군의 보급능력상 과연 문제가 되었겠는가 여부는 전 회의적이라고 봅니다. 광무제때 한나라의 경제능력을 보면 로마와 비교될 정도였고 어떤 부분은 로마보다 강력한 경제력을 기반으로 해왔습니다. 더욱이 전한의 전성기였던 광무제때잖습니까? 전성기때의 경제력을 감안한다면 굳이 보급능력의 존속기간 여부가 타당했을까 여부는 회의적이라고 봅니다.


그런 점은 결국 왕검성에서는 공방전때 고조선의 지배층에서 휴전에 대한 이야기를 재차 꺼내면서 분열을 더욱 초래했던 점은 한군이 그만큼 장기간의 전쟁지속력이 있었다는 겁니다. 고조선은 그것이 한계에 달해서 문제에 와 있었다는거고요. 버티기 작전이 성공할수 있었던 전제조건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차이는 뚜렷합니다. 똑같이 공격을 받았던 고구려때는 오히려 청야전술이라는 효과적이면서도 극단적인 전략이 탄생했던 배경의 성공이 무엇인지만 봐도 알수 있는 것이지만 고조선은 그런 전략이 제대로 먹힐수 있는 여건이 아니었다는 점에서  한나라의 전쟁지속능력보다 고조선의 능력이 한계를 넘고 있는 상황이었다는 점을 확인할수 있었던 점은 우거왕 피살이후 성기가 왕검성을 지키지만 백성들이 쉽게 동요를 해서 무너졌던 점은 이를 뒷바침 해주고 있다고 봅니다.


즉 보급능력 자체가 애초에 문제가 크게 안되고 있던 환경이라고 봐야죠.


마치며..


Warfare Archaeology님의 포스팅을 오랜만에 보면서 군사학적 이야기를 한번 끄적여 봤습니다. 더 높은 수준의 고수들이 이 문제 관련해서 이야기해본다면 군사학적 문제에서의 논문의 한계의 비판은 나올수 있을 것이고 이러한 논박은 의미있는 전쟁사 토론문화 형성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고조선과 한나라의 전쟁 흔히 우리가 고조선이 그만큼 강력했었다라는 것으로 이야기하지만 동시에 또 고조선의 관련 기록을 애타게 확보하고 연구해서 그 전쟁의 진실을 알고 싶어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충분히 이야기가 성할수 있지 않나 싶어서 먼저 숫가락 한번 올려봅니다.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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