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분단때 동서독군 관련 군사실태에 대해서 언급된 상황입니다. 한번 보신다면 한국군의 개선점이나 한국이 통일뒤에 북한군 흡수에서 북한군 해체및 군사통합에서 한국군 주도의 가능성에서의 조건들도 보실수 있는 문제라 생각이 드네요^^ 단순하게 힘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여러가지 조건이 되어야 주도권을 잡을수도 있다는 것을 말이죠.^^
독일연방군(서독군)
동독군과 달리 연방군의 경우에는 이제 제복입은 시민이라는 것에서부터 개념이 출발하게 됩니다. 72시간의 전투태세를 유지하되 장병들은 정상적인 외출/외박이 허용(기동타격대 지정 장병은 제외)되었고 거주시설/오락시설/식당/샤워시설등의 복지수준의 시설이 완비하였고 냉난방를 갖춤으로서 병사들이 군복무를 하는데 무형적 여건의 동기부여및 스트레스 해소를 통한 군의 각종 사고사건을 최소화하도록 했다고 합니다. 월급(이병월급: 25만원때)도 최저수준으로 어느정도 받아서 집에서 돈을 갖어다 쓸일이 없게 했으며 식사문제를 비롯해서 의식주 문제를 최소한 독일의 중산층 수준으로 대우받을수 있었습니다. 또한 정치에 대해서는 군은 엄정한 중립을 준수하도록 되어있었고 장병들은 선택의 자유에 의한 정당선택이 가능했다고 합니다. 국민교육에서는 이제 서독은 신병훈련 3개월이 처음으로 군사교육을 받는 것이었습니다.
장교단의 경우에는 엄밀하게 말해서는 엘리트 그룹은 아니었지만 보수와 복지등에서 중-상류층 생활이 가능하도록 대우를 받았고 별도 수당들이 있어서 경제적 어려움은 없었다고 합니다. 그외 일반참모출신 장교들은 엘리트 의식을 가지고 군을 선도하였고 강한책임의식과 국가와 조직에 대한 충성심으로 임무 수행을 했었으며 대대급 이상 부대에서는 장교단을 형성하여 장교회관을 운영하고 부대운영이나 개인신상의 문제점을 상호토의하는 분위기의 상부상조 분위기와 병영문화를 창출했다고 합니다. 이것이 결과적으로 임무형 전술의 원동력이 됩니다. 또한 대체적으로 이동인사가 거의 없는터라 그 부대에서 소위~소령때까지 머무는게 보통이다 보니.. 더 그렇다고 하더군요.
군사보안에서도 중요한 국가 및 군사비밀을 제외하고는 적의 공격을 억제한다는 차원에서 전부 공개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자율위주의 병영문화가 장교단부터 형성되다보니.. 이제 군대만큼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 맑은 곳 없다 했듯이 부사관이나 사병에게 까지 위 장교단 문화 형성에 따른 자율성 문화 촉신의 병영문화나 군대문화 형성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때문제 임무형 전술에서의 긍정적인 요소가 되었고 솔선수범이라는게 뭔지를 보여줌으로서의 군내의 갈등문제를 최소화했다고 합니다.
동독군(구 국가인민군).
동독군의 경우 민-군이 철저하게 격리된 상태를 보여줍니다 간부숙소는 부대인근으로 건축하여 지역주민과의 교류차단이 제한되고 동시에 병사들의 경우 가능한 거주지에서 원거리 부대를 배치함으로서 주말에는 고향방문이 의도적으로 불가능하도록 되어있습니다.(공산주의 국가 특성상 여행제한이 있다는거 아실겁니다.) 외출이나 외박이 제한되어 있는 모습을 갖고 있었고 전투태세를 위한 무기정비를 위해서의 시설확충은 매우 충실한 반면에 병사들을 위한 복지형태를 심각한 수준으로 의료시설은 미약하고 부상시 간단한 치료로만 대치하는 모습과 샤워시설/식당/오락실등의 복지시설은 부족하거나 관리미흡으로 병사들의 스트레스 해소의 요구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이 문제는 각종사고의 원인으로 나타난바 있습니다. 각종 불안을 야기시켰습니다.
정치적인 문제에서도 전형적인 공산주의 국가답게 공산당을 보위하는 근위군대의 역활로서 장교 96% 부사관 60% 단기복무병 14% 의무복무병 6~7%의 공산당 당원에 의한 군대를 만들어냈고 정치적인 발언에서등의 제약이 있었다는걸 아실겁니다.(공산당원만 또한 진급이 가능했습니다.)
또한 청소년때부터의 가중된 군사교육은 제한적인 범위내에서의 군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로 나타나서 군복무를 하게되는 원인으로 표출되었습니다. 장교단의 경우에도 각종 특권을 누리는 계층에 있었지만.. 장교단의 구성 자체가 금지에 상호간의 연대의식이 희박하고 상하급자간의 경직된계급중심 분위기를 마음을 터놓는 대화가 불가능하였습니다. 엘리트 의식과 함께 격리된 주거 생활은 주민과의 관계소원이 나타났고 주민들은 장교단을 특권계층으로 경원시했다고 합니다. 즉 군-민이 사실상 분리된 모습을 보입니다. 그럼으로서 90년에 군개혁에 대해서 국민들이 아예 믿지 않는 불신감을 나타냈고 동독군 장교단은 국민과의 괴리적 격리/불신뢰상황에 놓여있었습니다. 장교육성에서 공산주의의 우월성 강조때문에 공산주의 몰락과정에서 괴리를 겪고 당황한 동독군 장교단을 볼수 있습니다. 그것이 군 위상을 저하하게 만들었구요. 또한 동독군의 군사기밀은 군관련 전부여서 과도한 기밀보호의식에 국민들이 군을 아는 것도 별로 없고 동시에 내부적인 군기밀보호의식에 심지어 영관급 장교들처럼 자신부대에 대해서 제대로 아는게 없었고 장군조차도 동독군의 현 상황을 제대로 인식하거나 실태파악을 하지 못하는 수준이었습니다. 사실상 각기 장교-부사관-사병들이 괴리된 상황에 놓여있는 모습이었다고 합니다. 즉 모든 장병을 통제했습니다.
병사들 사이에서는 비공식 서열이 성행 병사감/차감/전역대기병등을 중심으로 예하 병사들에게 절대적 복종을 요구하였고 각종 기압과 교육등의 병사간의 상호 신뢰없이 구타나 사건사고가 성행했습니다. 이문제 해소하려고 장교에게 소대장은 7일간 외출금지조치 중대장에게는 3일간 영창조치 권한을 부여 독단행사권한을 줌으로서 병사와 지휘관의 갈등을 더 부추기게 되었다고 합니다. 즉 가득이나 괴리된 장교-사병간의 관계가 더욱 뒤틀리는 형국이 되었다고 합니다. 비민주적인 모습이 가장 심한 모습을 군대에서 보였다고 합니다.
이러니 통일말기에는 상호 전우애조차 나타나지 않아서 명령불복종 군인들의 개혁시위등의 각종 불안을 야기했습니다.
후기.
각군의 통합실태의 상황입니다. 군사통합의 사례에서 이러한 기준은 매우 중요합니다. 한국군도 통일을 해야하며 거기서 어떤 통일을 하던지 간에 군사통합을 해야하며 우리 주도로 해야한다는 점에서 한국군의 내외적 변화가 이런 독일연방군 서독군과 비교대상이 될수 있다는 점을 볼수 있는 글로서 올려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