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식으로 평가되는게 현실입니다. 냉정하게 말해서 그는 절대적인 국지전에서는 그가 유능한 면모를 보였을지 몰라도 그는 전면전 상황이라는 국가중대사태에서는 패전을 면치못한 패전지장이기 때문입니다. 한국전쟁의 결과는 아직 끝나지 않았지만 휴전까지의 결과물을 둔다면 유재흥이라는 인물에 대해서 비판적일수 밖에 없습니다.
특히 그가 저지른 2개 군단의 붕괴는 미안하지만 더글라스 아더 맥아더 장군의 유명한 고언인..
작전에 실패한 지휘관은 용서받을수 있어도 경계에 실패한 지휘관은 용서받을수 없다
라는 말의 핵심적인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이러한 경계에 실패한 용서받을수 없는 지휘관이 지난 노무현 행정부때 작전통제권 문제에서 선봉에 섰으니.. 비판은 더욱 극단화되고 가속화될수 밖에 없었던게 현실입니다.
건군에서의 일본사관학교나 만주군관학교 출신들에 대해서 비판적으로 보는 경향이 많습니다. 하지만 당시 광복군이 주축이 되었다할지라도 사정은 다르지 않습니다. 이러한 논쟁은 주요 밀리터리 사이트나 카페에서 핵심적인 한국전쟁을 이야기할때의 한국군의 지휘관 인적구성 관련해서의 문제를 낳고 있습니다.
유용원의 군사세계에서 이글루스에서도 활동하시는 금성천님께서 광복군 지휘관의 무능의 사례를 이사금님과 논쟁을 하면서 조금 보여주셨던 예도 저에게는 솔직히 상당히 충격이기도했습니다.(개인적으로 정밀하게 좀 포스팅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만..) 특히 한국의 정치적 성향상 좌파성향의 경우 친일파청산이라는 명목하에서의 극단적으로 공격적인 태도를 보이는건 현실입니다.(위키백과에서의 수정된 글을 봐도 그러한 모습이 있습니다.)
특히 유재흥에 관련해서는 더더욱 그런게 현실이죠. 일본육사출신이고 해방직전까지 대위로 근무한 예가 있었죠. 하지만 정말 미안하지만 광복직후의 한국군의 인적구성에서 광복군 출신들이 대단한건 아닙니다. 특별한 모습을 보인 경우도 있지만 동시에 안좋은 모습도 보인게 현실이지요. 더욱이 정규학문을 배운 입장과 다른 입장의 차이는 틀립니다. 도덕적으로 우세한 광복군이 절대적이다라고 보는건 넌센스입니다. 우리 한국의 반민족행위자 문제를 들먹일때마다 좌파들의 오류는 바로 극단적인 그들의 정치적 성향의 선전에서 나타나는 진실왜곡입니다.
자자.. 이제 유재흥에 관련해서 왜 한국전쟁사에 비판이 지속될수 밖에 없는지 좀더 나아가 보겠습니다.
유재흥이 한국전쟁에서 그가 비판을 받는 이유는 세가지입니다.
개전초기 7사단을 붕괴시킨 문제. 개전중반이후 중공군 개입에서 2군단을 붕괴시킨 문제. 그리고 이어서 현리전투라는 국군 최악의 전투로 3군단을 붕괴시킨 문제.
이 3가지입니다. 최소한 7사단때의 문제는 어쩔수 없는 측면이 강하더라도 군단붕괴에 의한 전략적 대실패로 연결되어진 그의 과오는 용납될수도 없습니다. 더욱이 3군단의 전투였던 현리전투의 패퇴는 그 스스로 냉정하게 말해서 경계에 실패했기 때문이기도합니다.(물론 미육군 10군단장 아몬드 소장의 문제도 있었지만요.)
최소한 개전초기 한국군 7사단에 부임한지 한달만에 적의 공격축선에서 자신의 사단 그것도 사단전력이 줄어든 2개 연대로 방어를 한다는건 말도 않되는 소리입니다. 당시 북한은 105 전차여단을 7사단 전면에 배치하여 내려왔기 때문에 대전차능력도 없고 경보병으로 서부전선에서 기동여단을 방어하라는건 그냥 죽으라는 이야기나 다름이 없습니다. 더욱이 사단장이 부임하고 나서 한달기간은 아무리 빨라봐야 제7보병사단(칠성부대)에서의 업무파악중이라는 현실입니다. 더욱이 전임 사단장이자 광복군 출신이라고 하는 금성천님은 L모 소장이라 하셨지만.. 이준식 준장의 7사단에서의 방어준비태세 미흡의 문제는 유재흥이 갖어야할 책임이 아닙니다.
제대로된 기동여단을 주고 방위에 방어준비태세를 갖추어도 지금 방어를할수 있다는 결과물이 도출하는데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 사단병력이 줄어든 그것도 사실상 2개 연대라면 사단 전략예비가 없다는 이야기입니다.(한국군의 3각 편제의 예를 봐도 그러하죠.) 예비대가 없는 상황에서 적의 최고 핵심의 고밀도의 돌파부대와 대적한다는건 사실상 방어불능에 가깝습니다.(영화나 드라마속에서 나오는 그런 기적은 거의 꿈꿀수 없습니다. 그게 전쟁의 현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개전초기 7사단의 패퇴와 붕괴및 해체는 어쩔수 없는 문제이기도합니다.(정말 인사이동등의 책임은 채병덕이 져야죠.) 이러한 문제에서 유재흥이 개전초기 국군의 열세와 주공축선의 담당에서 그가할수 있는 일은 최선을 다한 것이라고 변명이 가능하며(최소한 안했어도요.)이 것에 대한 비판은 자제되어야합니다. 누가 그 상황에 왔더라도 북한군의 방위는 불가능했습니다.
1940년 서부전역 당시의 구데리안의 독일군 기계화군단을 스당에서 방어하던 프랑스군의 55사단의 예도 이와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2군단의 패퇴 문제는 저는 작전의 실패라고 봐야할지 경계의 실패라고 봐야할지 두가지중에서 좀 혼동하는 편입니다. 하지만 저는 거의 경계의 실패라고 보는 이유입니다. 한국군 2군단의 붕괴는 장진호 전투라는 최악의 전투뿐 아니라 동시에 한국이 전략적으로 북한지역에서 패퇴하는 문제를 낳았기 때문입니다. 만약 2군단이 붕괴하지 않았다면 한국군이 전선사수에 의한 단계적 철수 혹은 방어선 유지를 하는 측면에서 적을 방어했을 가능성도 높다 생각하기 때문이죠. 더욱이 3군단의 현리전투의 경우 1개 대대에 불과한 중공군의 뒷총에 군단장부터가 작전참여를 구실로 내뺐다는건 총살감입니다.(백선엽 예비역 장군의 저서에도 그의 작전참여가 없었다는걸 증언하는걸 뒷받침한다는걸 보면 더욱 그러하죠.)
더욱이 내부적인 적 즉 그가 내뺐다고 내부에서 선전하는 자가 있었던 3군단의 예를 보면 그가 지휘관으로서 군단급의 부대를 장악하고 있지 못했을뿐 아니라 동시의 내부의 적에 대해서 경계를 하지 않았고 있었다는 결정적 반증입니다. 더욱이 당시 오마치 고개에서 미육군 10군단장 아몬드 소장이 항의를 했더라도 그 스스로 고집을 부리는 한이 있더라도 미군의 교대병력이 오면 철수하겠다라고 했어야 맞습니다. 항의한다고 쫄아서 병력 빼자마자 중공군이 오게 방치한 셈입니다. 적이 내부로 들어오는데 방치한건 미10군단 스스로의 작전지역의 책임을 물어야하는 문제이지만 동시에 3군단에게도 책임이 없다고 할수 없는 문제입니다. 각각의 책임구역의 경계선상에서의 경계가 소홀히 해진다는건 -전투감각- 서경석 장군이 자신이 월남군 민병대와 자신의 중대전술기지 사이에서의 경계선상에서의 전술적 교훈의 예도 있듯이 작전술적 차원에서도 마찬가지라는것입니다.
2개 군단의 외부적 그리고 내부적인 군단장으로서의 경계실패에 의한 통일불가능 및 북한지역에서의 철수를 비롯한 문제는 유재흥의 패전책임은 분명하다 생각합니다. 그의 2개 군단 붕괴는 전선의 붕괴를 낳았을뿐 아니라 오늘날 휴전대치 상황을 만들었다는 결과론적 입장을 본다면 그가 한국전쟁사의 패전 특히 군단급 부대 사실상 야전군급 부대를 붕괴시킨 전례는 어떤 경우에서도 피할수 없을것입니다.
그의 경계실패 하나가 한국군과 UN군의 북한지역에서의 총철퇴를 비롯한 수도 서울을 다시 빼긴 치욕스러운 전례를 만든 전략적 실패와 작전술적 실패는 용납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최소한 제가 유재흥에 대해서 보는 시점은 그가 전면전에 적합한 지휘관이 아닌 사람이었다는것과 그가 한국전쟁에서 최소한 개전초기의 문제를 제외하고는 한국전쟁사에서 비판적인 문제로 볼수 밖에 없는 이유는 바로 2군단의 붕괴해체와 3군단의 붕괴해체에 따르는 전략적인 대실패를 정치적으로도 군사적으로 만든 장본인이라는 책임자이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한국전쟁사에서 유재흥이라는 인물이 지속적으로 비판받을수 밖에 없는 이유라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