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3년 3월 7일 DMZ 표지판 보수작업차 비무장지대로 들어간 3사단 장병에게 북측에서 기습사격을 가해 황모 대위와 김모 하사가 부상을 당하자 이에 당시 사단장 박정인 준장(육사 6기)이 북한군 GP에 포격명령을 내려 쑥대밭을 만든 북측으로선 되로 주고 말로 받았던 사건입니다. 이뒤로 북한이 DMZ에서의 도발이 상대적으로 줄었다고 하더군요; 유용원의 군사세계에서 올려진 것으로 기억합니다.
DMZ 포격사건
DMZ 표지판 보수작업 실시계획을 인민군측에 통보하였다. 이어서 28일에는 유엔군사령부에서 작업 승인지시가 내려왔고 군단은 3월 7일과 8일 양일간을 작업일로 지정해 주었다.
그런데 인민군측은 도전적인 행위로 중앙분계선 바로 북쪽에559 GP(감시초소)를 불법 설치하고 20여 회에 걸쳐 육성비난을 하면서 우리의 비위를 건드려 보려고 하였다.
다시 도전책의 하나로 인민군 559 GP 바로 남쪽에 있는 우리측 표지판 0654번을 의도적으로 제거하는 휴전협정 위반을 자행하였다.
사단장으로 한참 지휘력이 발휘되는 1973년 2월 27일, 춘계 나는 적의 심리전 시도를 이미 알고 있었으므로 어떤 함정을 만들고 있다고 간파하고 있었다. 그러나 언제나 공세적인 나는 그것들이 적의 함정임을 알면서도 우리 지역에 마음대로 드나들며 우리의 표지판을 제거하는 따위를 내심 용서할 수 없었다. 특히 당시는 남북협상이 시작되어 상호 비방을 안하도록 해서 쌍방 모두 방송을 중단하고 있을 때였다.
나는 정보참모에게 우리측 표지판 보수작업을 명령하면서 문제의 표지판인 0654번은 남북협상중에 문제가 발생되면 안되니 일단 작업을 보류하라고 일렀다.
그런데 당시 군단장이 3월 5일 사단을 방문하여 내가 신중론, 즉 적의 함정임을 설명하였으나 그는 0654번 표지판을 포함한 작업 강행을 지시하였다. 또한 군단 정보참모가 사단 정보참모에게 작업강행을 지시했다. 이리하여 3월 7일의 표지판 보수작업이 실시되었다. 그런데 이날 작업을 완료하고 귀대 도중 인민군은 아군 지역의 우리에게 기습사격을 가하여 황대위와 김하사 등 2명을 중상케 하는 무자비한 만행을 저질렀다.
나는 보고를 받자 예상대로 적의 함정에 빠졌음을 인식하고 인민군에 대한 응징책을 준비시키는 한편 마이크로 적측에 사격 중지를 요구하였다. 그리고 사격으로부터 발생하는 사태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인민군 측에 있다고 수차 경고하였다. 그러나 인민군은 나의 경고를 무시하였다.
나는 인민군에게 합법적인 응징을 하리라 마음먹고 관측기를 상공에 띄워 포병 관측장교로 하여금 표적인 559 GP를 관측케 하여 사단 포병에게 사격을 명령하였다. 155밀리 곡사포, 105밀리 곡사포는 즉각 불을 뿜어 인민군 559 GP를 강타하는 한편 우리에게 불법사격을 가하였던 적 보병 배치선에 포탄을 작렬시켰다. 그런 다음에 부상당한 황대위와 김하사를 안전지대로 구출하기 위해서 백린 연막탄을 발사하고 철수작전을 전개시켰다. 그런데 그 연막탄으로 말미암아 전지역에 불이 붙어 지뢰터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오기 시작하면서 적 보병이 도망하는 것을 목격할 수 있었다.
사격후 5분 만인 14시 20분, 한신 대장 후임 군사령관 최세인 대장의 전화가 걸려왔다. 나는 ‘지휘관은 위기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그 현장에서 진두지휘해야 한다’는 평소 신념에 따라 현장에 있었기 때문에 나 대신 새로 부임한 참모장이 전화를 받았다. 군사령관의 전화내용은 다음과 같다.
「부상자에 구애받지 말고 과감하게 작전하라.」
군사령관 전화통화 10분 후인 14시 30분, 군단에서는 군단장 지시라며 군단 참모장이 사단 참모장에게 다음과 같이 지시하였다.
「환자 구출을 위하여 무리하게 사격하지 마라.」
이 두 경우, 군단장의 지시는 부상자 황대위와 김하사를 버려도 좋다는 것이 아닌가. 아니 우리 지역에서 적이 휴전협정을 위반하고 우리에게 사격하여 생긴 불상사인데 부상 장병을 구출하지 않아도 된다는 뉘앙스 풍기는 지시를 내리다니 될 말인가. 나는 따를 수 없었다. 나는 정당한 임무를 수행해야 했다. 그리하여 끝내 부상 장병을 구출, 후송하게 함으로써 포격작전을 끝냈다.
이날 밤 나는 김일성과 인민군을 골탕먹이기 위하여 사단내 전트럭을 동원하여 라이트를 켠 채 DMZ 남한한계선까지 진출시켰고 부분적으로 중앙분계선 남단까지 진출케 하였다.
이 바람에 북한측에서는 난리가 났다. 김일성은 즉각 전군비상 및 동원령을 내렸고 한반도에는 일촉즉발의 위기가 감돌았다.
후에 이 사건을 계기로 유엔군사령관은 전쟁방지를 위하여 해명 담화를 발표하였는데 그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이번 사건은 북한측의 휴전협정 위반으로 일어난 것이고 유엔군은 부상병 구출을 위한 자위적인 작전을 전개한 것 뿐이다. 전투할 의사는 분명히 없다.」
백골부대를 떠나면서...
1973년 4월 3일, 마침내 나의 사단장직을 해임한다는 통보가 내려왔다. 나는 담담한 심정으로 상부의 명령을 대기하였다. 나는 언제나처럼 ‘최선을 다하였으므로 상부의 어떤 결정에도 따른다’는 신조였기에 마음은 홀가분하였다. (중략)
후일의 일이지만, 1985년 9월 20일 이산가족 평양방문단의 일원으로 함경남도 도민회 이상순 회장이 평양에 갔을 때 호텔로 정치보위부 고위간부가 찾아와,
「함경남도 신흥군 출신의 박가 성을 가진 요란한 사단장 요즘 뭘 하오?」
라고 질문하여 이 회장은 섬뜩한 생각이 들어 상세히 설명 안하고 태연하게,
「나는 사업가니까 군 관계는 전혀 모르오.」
라고 대답하였다는 것이다. 당시 그 공산당 간부의 표정으로 보아 3·7포격사건으로 박정인 장군에 대해 상당히 원한이 있는 것처럼 보였고 그 포격사건이 적측에 안겨준 충격이 얼마나 컸었는지를 가히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었다.
저의 후기.
그야말로 역관광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북한보면 말로는 무자비한 보복등을 이야기하지만.. 정작 저들은 말뿐이라는거..
우리군이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저들의 허풍협박은 더 심해질 것입니다.
북한이 도발할때 저것처럼 해본다면 딱 좋을지도 모르겠네요.. 멍청한 녀석들은 패야 말을 들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