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말기 일본군에 끌려간 학도지원병(사실상 강제 징병 이하 학병)은 4300 여명이고 1938년부터 1943년까지 일본군에 지원한 육군특별지원병(이하 지원병)은 17600 여명입니다.
저는 단순한 이분법을 매우 싫어합니다만 이들 학병과 지원병 사이에는 이분법으로 나눠도 될만 한 큰 차이점이 몇가지 있습니다.
먼저 학병들은 전문, 대학재학 이상의 고학력자들이었고 지원병들은 소학교 졸업 정도의 학력자들이었습니다. 재산상에 있어서도 학병들은 먹고 살만한 집안 자제들이었고 지원병들은 8-9할이 소작농의 자제들이었습니다.
김윤식교수는 그의 저서 <일제말기 한국인 학병세대의 체험적 글쓰기론>에서 "학병들이 특수한 경우를 빼면 그들의 선대들이 민중을 착취해서 모은 부의 축적 위에서 비로소 전문, 대학 교육을 받을 수 있었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원병들의 부, 조부들은 착취 당하던 사람들이었다고 봐도 큰 무리는 없을 것입니다.
학병과 지원병들의 또하나 큰 차이점은 일본군입대에의 자발성 여부입니다. 학병들은 일본군에 끌려가는 것을 너무나도 싫어했습니다. 반면에 지원병들은 일본군입대를 간절히 소망했습니다.
1943년 지원병 지원자 수는 303294 명이었고 그 중 합격자 수는 6300 명이었습니다. 요즘 한해 대입 수험생 수가 650000 명 정도 되나요? 그 중 14000 등 정도 안에 든다면 상당히 우수한 사람이라고도 볼 수 있겠지요.
학병들은 해방 후에 모임도 갖고 그들이 일본군에서 겪은 이야기들을 책으로 펴내기도 했습니다만 지원병들은 학식과 지성도 부족했고 일본군에 자원 입대했다는 것이 부끄러워서인지 모임도 없었습니다. 그들이 왜 일본군에 지원했는지, 일본군에서 어떤 일들을 겪었는지에 대해서도 거의 기록을 남기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지원병 출신들이 일본군에 지원입대하였다해서 이들을 친일파나 무식하고 저열한 인간들로 보는 것은 공정한 판단이 아닙니다. 그들은 일본에 충성하기 위해서 입대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도 여건 좋은 부모를 만났다면 얼마든지 대학에 들어갈 수 있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미야다 세츠코는 <조선민중과 황민화정책>에서 극한 상황에 이른 조선 농민들의 궁핍이 조선인으로 하여금 일본군에 지원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 최대의 원인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여건상 더 학업을 이어나갈 수 없었던 농촌의 청소년들로서 그들의 아버지 할아버지들이 겪어온 소작농의 고단한 삶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것이 그들의 가장 솔직한 지원이유였던 것입니다.
구타와 기합이 심한 일본군복무를 마치고 상등병으로 제대만해도 각종 사회적 지위상승과 경제적 혜택이 있었고 설령 이인석 상등병처럼 신음하며 전사한다해도 "천황폐하 만세" 외치며 장렬히 전사했다고 영웅시하고 유가족에 대해 적극적인 우대책이 선전되었습니다.
학병출신들의 글을 읽다보면 지원병출신들을 경멸하는 경우도 보입니다. 실제 한심한 자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가지가지입니다. 일본 내무성 경보국자료에는 조선독립을 위해 일본군에 지원하여 무력을 체득한 후 장래의 봉기 때 헌신하겠다는 지원자도 있었으니까요.
학병으로 끌려갔던 엄영식 교수의 <탈출>을 인용해봅니다.
총독부에서는 1943년 12월 10일 학도병들이 입영하기에 앞서 군대의 예비지식을 갖게하고 자기들의 위세를 과시하기 위해 소위 연성회라는 것을 마련하였다. 기한은 일주일이었고 장소는 경성대학 법문학부와 동성상업학교였다. 일주일의 예비훈련은 고되고 까다로왔다.
우리를 훈련시키는 조교라는 조선인 상등병 두 놈이 어찌나 까다롭게 구는지 구역질이 날 지경이었다. 도대체 나는 군사훈련이란는 것이 싫었다. 나는 훈련중에도 내가 어찌하여 이 신세가 되었는가 한탄하기도 하였으니 조교들이 나에게 일본정신이 하나도 들어있지 않다고 야단치는 것도 당연하였다.
시간은 흘러가는 것이기에 일주일의 훈련은 끝났다. 훈련이 끝나는 전날 밤 조교들의 주선으로 헤어짐이 아쉽다고 한 자리에 모였다. 조교들이 말하기를 "우리는 육군 특별지원병출신들이다. 여러분 형님들이 일본군에 입대하는 것은 가슴 아픈 일이다. 입대한 후 형님들이 겪게될 격렬한 훈련과 까다로운 내무반생활을 조금이나마 익히게 하기 위한 것이었으니 지나치게 대한 것이 있으면 본심은 아니었으니 용서를 바란다. 듣기로는 미국에서 이승만이 독립운동을 한다고 하고 중국에서는 김구 등이 임시정부를 수립하여 독립의용군을 편성하였다고 한다. 우리 민족에게도 밝은 앞날이 머지않아 닥쳐올 것이다. 우리가 일본군에 지원한 것은 일본놈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고 우리 민족에게 쓸모있기를 바라서였다. 반드시 우리 민족이 독립하는 날이 올 것이다. 그동안 형님들에게 까다롭게 군 것을 용서해 주기바란다."하는 것이었다.
나는 이 말을 듣고 놀라지 아니할 수 없었다. 역시 그들의 핏줄에도 조선의 피가 흐르고 있었구나 하고 생각하니 총과 칼로는 조선의 피를 아마데라스 오호마까미의 피로는 절대로 바꾸지 못한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이제 일본놈들이 우리 민족을 압박하고 착취하다 못해 청년들을 총알받이로 전쟁터로 몰고 가지만 머지않아 망하고 말 것이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참고자료
<조선민중과 황민화정책> 미야다 세츠코 일조각
<일제말기 식민지 지배정책연구> 최유리 국학자료원
<일본의 군대> 요시다 유타카 논형
임부택, 공국진의 회고록
지원병연구에 필수적인 <조선민중과 황민화정책>은 인XX크에서 구입 가능 하고 <일제말기 식민지 지배정책연구>는 출판사에서 구입 가능할 겁니다.
금성천님의 보충설명.
약간 보충설명 드리면 1938년부터 1943년까지 6회의 육군특별지원병 모집기간동안 총 지원자수가 800,000 명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우리 교육에서는 이런 것을 전혀 가르치지 않습니다. 임종국씨 같은분도 그렇게 많은 지원자들이 있었던 것을 알면서도 <일본군의 조선침략사>에서 마치 조선청년들이 전부 강제징병 당한듯이 기술해 놓고 있습니다. 일면 민족의 치부처럼 보일 수 있어도 사실은 그대로 인정하고 왜 그런 사정이 있었는지를 차분히 따져봐야 역사에서 제대로된 교훈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제가 얼마전 <식민지 근대의 패러독스> 라는 책을 읽어봤는데 역시 놀라운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학계의 권위자인 모교수는 공적으로는 매우 반일적인 태도를 취하며 학생들에게 일본어서적을 보지 못하게 한답니다. 그런데 그런 그의 권위를 지켜준 지식의 원천이 사실은 일본(자료)에 있다는 겁니다. 이런 식으로 교육하면 극일하기가 정말 어렵습니다.
위 본문에서 지원병들 중 한심한 자들도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중 가장 이해가 가지않는 인간이 바로 겐뻬이 고죠(헌병오장) 시게미쓰 구니오(신상묵)입니다. 이 자는 좋은 학교도 나왔고 안정되고 존경 받는 직업도 갖고 있었습니다. 없는 집에서 태어나 배우지 못한 탓에 신분상승을 꿈꾸며 일본군에 지원한 대부분의 조선청년들과는 달리 스스로 신분강등을 하면서까지 일본군에 자원입대하여 헌병으로 독립운동가를 잡아들이고 고문도 서슴치 않는 일제의 개노릇을 합니다. 도대체 이 자의 내면세계는 어떤 것이었을까요
후기.
학병과 지원병이 무엇의 차이가 있고 무엇이었는지 한국에서 논해진 자료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좋은글이기에 그전에 올렸었는데.. 티스토리로 옮기면서 하지 않고 있다가 지금에서야 다시 올려봅니다.
한번 우리역사의 아픈 단면중 하나인 식민시대의 학병과 지원병의 명목으로서 조선인들의 선택이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대체적인 목적등이 무엇이었는지등을 볼수 있는 자료로서 보시길 바라겠습니다.
p.s 2010년 4월 24일(제가 본 기준)부터 시작된 역사밸리에서의 혼란이 이제는 잘 마무리 되기를 바라겠습니다.